2019년 가을학기 진군예배
거듭남과 하나님의 나라
말씀 / 요한복음 3:1-15
요절 / 요한복음 3:3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행복을 찾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면의 문제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니고데모의 문제는 또한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이 시간 니고데모의 문제를 되짚어 보는 가운데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오늘날 신학박사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는 산헤드린 공회원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장관급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유대인의 유명한 선생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첫째가는 실력과 인격을 두루 갖춘 교수였습니다. 게다가 돈도 엄청나게 많이 소유하였습니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의 정상에도 오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과 명예, 지위와 권세를 모두 손에 쥐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밤 중에 최고급 벤츠 마차를 끌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왜 밤에 찾아왔을까요? 낮에 업무가 바빠서 일까요? 아니면 사회적 체면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온 것일까요? 요한복음에서 밤은 곧 어두움을 상징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는 것은 그의 내면이 밤과 같이 어두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니고데모의 뜻은 성공자입니다. 그는 이름대로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공 뒤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노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5살 때부터 바리새인 학교에 입학하여 혹독한 영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중고 시절에는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수능에서 모든 과목에 백점을 맞았습니다. 합격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하였습니다. 모든 수험생들은 이 말을 듣고 헐! 하였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미팅, 아르바이트 할 때 도서관에 틀어박혀 외로이 책과 씨름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하였습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하였습니다. 또 미스 이스라엘 진 출신과 결혼하여 뭇 남성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대쪽 같은 성격 때문에 부정과 비리에 연류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공적을 인정받아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본받고 싶은 인물로 항상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가 쓴 책 “나는 이렇게 승리자가 되었다“ 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 경제에 관한 유투버 강의는 매회 조회수가 100만을 넘어갔습니다. 니고데모는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는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소유와 성취가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취의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꿈을 이룬 후에 오는 공허감에 시달렸습니다. 실패로 인한 절망보다 목표를 성취한 뒤에 오는 허탈감이 더 치명적입니다. 무엇보다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풀리지 않는 내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징들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적적으로 내면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은 한눈에 그의 문제를 아셨습니다. 그의 문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생명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입니다. 죽음도 아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공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로마서 14:7) 참된 행복은 거듭나 이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밑 빠진 독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하에 살다 보면 지상에서 살고 싶고, 지상에서 살다 보면, 좁은 평수라도 내 집이 있었으면 합니다. 내 집을 얻으면 방이 3칸에 화장실이 2개였으면 합니다. 학생들은 속도도 빠르고 텃치로 조절되는 최신식 노트북을 가지면 공부도 열심히 하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신식 노트북을 갖고 나면 시간과 마음을 다 빼앗기게 됩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기종을 원하게 됩니다. 또 원하는 과, 원하는 대학에 가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심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면 무지개 꿈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갈등과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빈 목자님은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된 지 몇 개월도 안되 계속 해야되, 말아야 되 갈등하기도 하였습니다. 소유와 환경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대통령이 제일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제일 불행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존재의 변화에 있습니다. 거듭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자는 어떠합니까? 환경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와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체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으로 인해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에 니고데모는 황당해 하였습니다. "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반발하였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요 학식이 풍부한 노박사였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육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악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이는 성형수술을 통한 변신이나 개선이 아닙니다. remodeling이 아니라 recreation입니다.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거듭남은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성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권세입니까?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영적 생명입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물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돈으로도, 벼슬로도, 맘착해도 못갑니다. 오직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만이 살길입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입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 중심적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 된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인된 권리를 양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한 사람들 심령에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이 임할 때 죄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됩니다. 거듭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육은 육을 낳고 영은 영을 낳습니다. 육은 영을 낳지 못합니다. 육은 박사학위를 10개 받아도 육입니다. 육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육입니다. 육은 아무리 종교적인 수행을 하여도 육입니다. 어느 구도자가 8년을 눕지 않고 면벽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육입니다. 육은 아무리 투쟁을 하여도 육입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시켜 줍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령의 역사를 알기 쉽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8절을 읽어주십시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런 바람을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휘이익~ 소리를 통해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아! 바람이 부는구나!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의 활동도 이와 같습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성령께서 일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된 모습을 보고 아! 성령께서 역사하셨구나! 깨닫게 됩니다.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늘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인상을 쓰며 살던 사람이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하던 입에서 찬양과 감사가 흘러넘치게 됩니다. 감정적이고 혈기가 충만한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무의미 무감동 무기력한 사람이 활기가 넘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거듭난 자는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찬송가를 지은 존 뉴턴은 원래 노예선 선장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다 판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았을 때 은혜로운 찬송가를 많이 작곡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활동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놀랍고도 은혜로운 성령의 역사를 들었습니다. 그는 아멘! 하며 성령의 역사를 영접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반발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적 무지에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유명한 선생! 당신의 수준이 이 정도냐? 책망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는 것, 본 것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를 직접 계획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의 설계자로부터 직강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비상식적이다.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발하였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땅의 일은 회개와 거듭남과 같은 일들입니다. 구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일이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생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 땅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수록 니고데모는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제는 책망받기 싫어서 어찌! 어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를 어떻게 도울까?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가 잘 알고 있는 광야사건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이 험하다고 불평했습니다. 음식 타령, 물 타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평하느라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입을 물게 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백성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습니다. 놀란 백성들은 모세에게 달려갔습니다. 제발 우리를 살려주세요, 빨리요! 하나님은 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셨습니까?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이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낫게 됩니다. 이 놋뱀을 쳐다보세요! 쳐다보면 낫는다! 이보다 더 빠르고 쉬운 치료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방법이 너무 비상식적입니다. 뱀에 물렸으면 독을 빼내야 합니다. 해독제를 먹어야 합니다. 단순히 쳐다보면 산다? 완전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주여 믿습니다! 하며 쳐다본 자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저 모세가 미쳤다! 하며 믿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 이는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왜 니고데모에게 놋뱀 사건을 말씀하셨을까요? 믿음을 통한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니고데모는 행복을 얻고자, 영생을 얻고자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생은 인간적인 성실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놋뱀사건이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아나게 됩니다.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단순히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거듭나서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스펙을 쌓고 더 많은 업적을 쌓아야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저희가 가을 학기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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