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성탄 메시지 1강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나셨다
말씀:이사야 9:1-7
요절: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오늘 말씀은 이사야가 전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이사야는 BC700년 경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요즘 경제가 IMF 때보다도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정치적으로도 40년 만에 계엄이 선포되었고, 대통령 탄핵 문제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활동하던 그 시대는 우리보다 훨씬 더 부패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강국 앗수르의 위협으로 이스라엘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러한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메시아 탄생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는 한 아기로 인해 세상에 임할 놀라운 축복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의 비전은 700년 후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아기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성탄의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Ⅰ.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1-5)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갈릴리 북쪽의 국경 지역입니다. 이곳은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특히 B.C 734년 앗수르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더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을 앗수르로(왕하15:29), 다른 식민지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 결과 갈릴리는 혼혈족의 땅이 되었고 혼합종교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동족들은 이런 그들을 이방인 취급을 하며 멸시하였습니다. 이런 멸시는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날 수 없어” 무시하였습니다. (요7:52)
그러나 이런 갈릴리가 영화롭게 됩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이곳에서 하셨습니다. 12제자 중 11명이 이 지역 출신입니다. 인류 역사를 바꿔 놓은 위대한 사도들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사모하여 많은 이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은 갈릴리 지역의 주민들을 의미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죄와 사망 권세 아래 고통받는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흑암에 행한다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것은 죽음이 주는 슬픔, 두려움, 무의미, 허무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합니다.
60년대 가수 최희준의 히트곡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의 덧없음을 묘사하였습니다. 이 곡이 히트를 친 것은 많은 사람이 공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살아갑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의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방향을 제시하며, 에너지를 공급해 줍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님은 돋는 해요 치료의 광선을 발하는 공의로운 해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이 빛으로 나오는 자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와 같이 기쁨으로 뛰놀게 됩니다. 밝고, 의미 있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생명의 빛은 먼저 베드로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는 갈릴리 어부로서 물고기의 숫자에 따라 울고 웃던 자였습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해변의 물거품처럼 허무한 인생을 살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그의 설교로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 전•후서의 저자요,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빛이 임하면 삶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빛에 거하는 자들의 즐거움이 어떠합니까?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예수님의 빛은 우리의 삶에 즐거움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 즐거움은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그러나 누렇게 익은 곡식을 볼 때 그동안의 수고가 눈녹듯이 사라집니다.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은 더 큽니다. 전쟁에서 이겨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큰 기쁨입니다. 거기다가 탈취물을 나눌 때 그 기쁨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멍에, 채찍,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억압하는 도구입니다. 멍에란 소의 목에 얹는 무거운 막대입니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노예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미디안의 날과 같이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어버리십니다. 미디안의 날이란 기드온과 300용사가 미디안 10만 대군을 하루에 멸절시킨 사건입니다. 이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미디안의 날과 같이 꺾어질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 가장 기쁜 소식일까요? 돈이 없는 사람들은 롯또에 일등으로 당첨되는 것이고,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파트 분양권 당첨 소식일 것입니다. 시험을 본 사람들은 합격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습니다.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죄와 사망의 멍에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사도 베드로는 핍박으로 고향을 떠나 나그네 된 그 당시 신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시대가 어렵지만 죄 사함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으로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인류 역사는 한마디로 싸우는 역사입니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한창입니다.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푸틴은 핵무기를 쓰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를 정지시키지 못합니다. 이 땅에 전쟁을 진정으로 종식 시키실 분은 한 아기 예수님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II. 한 아기의 이름들 (6-7)
우리는 지금까지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 누리게 될 축복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십니까? 6a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정사란 통치권을 말합니다. 통치자의 이름은 통치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한 아기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첫째, ‘기묘자요 모사’가 되십니다. ‘기묘’는‘초자연적인 것’ ‘모사’는‘ ‘충고하다’란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Wonderful Counselor’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놀라우신 상담자가 되십니다.
니고데모는 부와 권력, 명예를 모두 가졌습니다. 그러나 내면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너무 답답하여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의 문제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모세율법대로 돌로 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먼저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돌을 내려놓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인에게는 용서와 새로운 삶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기기묘묘한 지혜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마치 파도처럼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졸업하면 취업 문제, 취업하면 승진과 결혼문제, 결혼하면 자녀 문제, 주택문제, 물질 문제, 좀 살만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들이 생기면 염려가 되고 두려워집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최고의 상담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오히려 Wonderful Counselor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전능이란 단순히 능력이 많다. 유능하다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것만은 못 하실 거예요! 이 말은 아직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절규합니다. 주님... 더 이상 길이 없어요, 사방이 막혔어요. 이제 정말 망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어두움에서 빛을, 절망에서 소망을 이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할 때 일하기 시작하시고, 사방이 막혔다고 할 때 새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귀신 들린 거라사 광인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38년 된 고질병자를 고치셨고,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며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능하신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보호자요 필요를 채워줍니다. 자녀들에게 든든한 안식처가 됩니다. 그런데 인생 소감을 들어보면 술 먹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독단적인 권위로 자식들에게 상처 주는 아버지, 가정을 등한시하는 무책임한 아버지로 인해, 아픔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반대로 자식을 위해 전폭적으로 희생하는 가시고기 같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과 지혜가 부족합니다. 몸은 늙고, 병이 들고,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됩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보호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기뻐하시며 모든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이사야 55:9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며,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은 낮고, 좁고, 즉흥적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깊고, 높고, 넓습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최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넷째, 평강의 왕이십니다. 평강이란 내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말합니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장, 학업, 인간관계 등에서 스트레스를 경험합니다. 또한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과 불안한 미래로 인해 평안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이나 독서, 운동, 여행, 맛집 탐방을 합니다. 술과 담배 심지어 마약은 우리 생활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진정한 평강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강을 주노라. 내가 주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세상이 주는 평강은 환경에서 옵니다. 그래서 좀 더 많은 돈, 좀 더 좋은 집, 좀 더 좋은 직장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한계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외부에서 오지 않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나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극적으로 감사할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기도할 때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 나라는 흥하고 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세상 나라는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부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보존됩니다. 이 모든 일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 이유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 때문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흑암에 있던 우리에게 큰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짓누르던 죄와 사망의 멍에를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꺾으셨습니다.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아기 예수님은 ‘Wonderful Counselor’요 전능한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우리를 돌보시며 평강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한 아기를 주셨습니다. 저희가 이 아기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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